유럽 현대미술관 여행 2011 6/26-7/12 - 010
글쓴이 : 큰사과나무    작성일 : 2012-07-24    조회수 : 14019 첨부파일 : VFREVF80Mjkg.jpg
유럽 현대미술관 여행 2011 6/26-7/12 - 010

고흐가 죽기전에 살았던 오베르 쉬아즈의 여인숙으로 가다.

그 유명한 귀를 자르는 사건이 일어난 아를에서 시민들이 고흐가 정신병자라서 나다니면 위험하니 감금해야 된다고

90명의 시민들이 서명을 하는통에 생레미 정신병원에서 1년을 산 후에 1890년 5월 21부터 7월 29일까지 살은 곳이다.

아마추어 화가이자, 신경질환 전문의인 '가세'가 있어서 고흐와 테오는 오베르 쉬아즈로 오기로 결정을 한것이다.

아침햇살님은 고흐가 죽은 것은 가세박사 때문일 수도 있다고 말씀하신다.

70여일 동안에 80여점의 작품을 그리도록 만들어 안그래도 간질발작과 조울증에 시달리는 환자였던 고흐의 상태가 더 악화되었을 수 있다고.

고흐는 동생에게 보낸 편지에서 맹인이 맹인을 데리고 다니면 둘 다 넘어진다는 말을 하기도 했고, 나보다 더 병에 찌든 (sicker than I am)

사람이라고도 했단다.

고흐는 간질과 조울증, 정신분열증, 지나친 흡연, 알코올 중독, 임질, 매독등의 질병을 앓았단다.

그리고 그림물감에 납이 들어있어서 납중독 환자라는 설도 있다고 한다.

태양빛이 강한 프랑스 남부 아를에서 모자도 쓰지 않고 그림을 그려서 일사병에 걸렸을수도 있단다.

태어날때 머리에 손상을 입어서 간질이 생겼을 수도 있는데 불규칙적인 식사와 음주와 흡연으로 인한 영향 불균형,

작품을 그릴때 과도하게 쓰는 에너지, 그림이 팔리지 않아 동생 테오에게 의지하는 것에 대한 노심초사등으로

더 발작이 잦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리에서 (1885~1888) 동생 테오와 생활하며 인상파 화가들과 교류하면서 새로운 화풍을 받아들이기도 하면서

200여점의 작품을, 아를에서 1년 있는 (1888~1889) 동안 200여점, 상레미의 정신병원에선 (1889~1890) 100여점을,

오베르에서 70일동안에는 80여점의 작품을 남겼다.

여인숙을 가기전 고흐가 그렸던 오베르 성당을 갔는데 아직 미사전이어서 문이 열리질 않았다.

성당앞에 고흐가 그린 성당 건물 그림이 세워져 있다.

성당 건물 사진도 찍고 성당 앞에서 단체 사진도 찍었다.

입구가 보이지 않는 교회 뒷면을 그린것은 조직화된 종교에 인한 반감을 그린것이고, 왼쪽으로 걷는 여인은 과거 그가 사랑한

여인들의 상징이고 오른쪽길은 앞으로 가야할 길을 상징한다고.

선생님은 고흐가 탄광촌 보리나주로 갔던 것은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 하려고 갔던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보수적인 목사였던 아버지를 따라 목사가 되려고 했던 이유가 아마도 아버지한테 인정받는 아들이 되고 싶어서였지 않았을까?

정식 전도사는 아니였지만 가난하고 힘든 사람들을 위해서 뭐라도 하겠다는 마음으로 탄광촌으로 간 고흐는

자기가 가진것, 옷, 돈, 빵을 나누고 갱도에도 들어가 탄캐는 것도 직접 체험하고, 허드레 석탄을 줏느라

얼굴에 탄가루를 묻혀가며 동화되는 삶을 살았건만, 교단에선 기독교 성직자에게 어울리지 않는 행동이고,

추잡하고, 창피스럽다면서 임시직도 취소를 한다.

어빙스톤이 지은 빈센트, 빈센트, 빈센트 반 고흐란 책에서 그 장면을 읽으면서 종교의 권위주의, 위선에 가슴이 답답해진다.

몇년후 탄광촌 노동자들의 인간의식 변화를 다룬 소설 '제르미날'을 쓴 에밀 졸라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이라며

고흐를 인정하며 위로했을땐 오히려 부끄러워 하며 목소리를 낮춰 달라며 겸손해 한다.

왼손이 한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라는 말씀을, 행동과 일치시킨 삶을 살았으니 누가 알아주는게 오히려 부끄러웠나보다.

성당 위쪽으로 경사진 길을 올라가니 '밀밭위의 까마귀' 를 그렸던 밀밭이 나온다.


밀밭 한쪽은 추수를 했는데 나머지 한쪽은 추수를 하지 않아, 아직 누런 밀밭이 펼쳐져 있었다.

새그림을 그릴때 보통의 경우, 새가 멀리 날아가는 그림을 그리는데 '밀밭위의 까마귀' 그림은 까마귀가 쳐들어 오는것 같은 모습이다.

보통 3개월 주기로 고흐가 발작을 일으킨다고 했는데 아마 발작의 조짐이 있어서 고흐의 눈에 까마귀가 쳐들어 오는것으로 보였나 보다.

도반님 누군가가 '제다이의 역습'이라고 표현을 한다.

길이 쭉 연결된게 아닌, 중간에서 길이 끊겨 자신의 죽음을 암시한것 같은 그림이라고 봄볕님이 말씀하신다.

아! 그러고보니 가수가 노래대로 된다고 말하는데 차중락은 '낙엽따라 가버린 사랑'을 부르고 나서 죽었고, 김정호는 '간다 간다' 하고

노래를 불러 노래대로 되었듯이 고흐도 그림대로 되었나부다.

고흐가 죽은지 6개월만에 만성신장염으로 죽은 테오는 네델란드에 묻혔다가 23년만에 오베르쉬아즈 공동묘지의 형옆으로 유골을 옮겨왔다.

테오의 부인이 성서를 읽다가 사무엘서의 '죽음속에서도 그들은 서로 나뉘지 아니하였나니' 라는 글을 읽고 가슴에 큰 울림이 있었던 모양이다.


공동묘지에서 성당으로 내려 오니 미사시간이 되었는지 성당문이 열려 있어서 성당으로 들어가 앉았다.

아주 작고 아담한 성당이다.

고흐는 이성당에 들어온적이 있었을까?

성당 입구에 일본인으로 보이는 관광객이 안내인의 설명을 들으며 올라온다.

고흐가 마지막으로 기거를 했던 여인숙으로 가기 위해 그들 일행과 스치며 지나가는데 가이드의 설명이 한국말이다.




위대한 일이란 그저 충동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연속되는 작은 일들이 하나로 연결되어서 이루어진다.


많은 화가들은 텅빈 캔버스 앞에 서면 두려움을 느낀다.

반면에 텅빈 캔버스는 "넌 할 수 없어." 라는 마법을 깨부수는 열정적이고 진지한 화가를 두려워 한다.

(테오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고흐가 지냈던 여인숙은 워낙 작은 공간이라 2개조로 나누어 안으로 들어갔다.

먼저 고희의 일생을 찍은 필름을 보고나서 고흐가 마지막으로 살았던 방으로 들어갔다.

3평남짓 방벽은 오래돼서 갈라졌다.

고흐는 권총 자살을 시도한지 36시간을 고통받다가 죽었단다.

자살을 죄악시하는 그당시 사람들은 고흐가 지냈던 방으로 이사를 오는 사람이 없었으며 여인숙 주인도 방을

고치질 않아서, 고흐가 살던 흔적이 보존이 잘 된편이다.

고흐가 지냈던 옆방에 고흐가 지낼때와 똑같이 벽지도 바르고 침대와 손닦는 세면대와, 세면대 밑으로 물주전자를 놓아 두었다.

고난받는 예술가 이미지의 결정체인 고흐.

죽기전에 머무는 동안 극도의 외로움과, 가난속에서도 예술의 혼을 불살랐던 곳이라 하니 더 애틋하고 짠하다.

고흐가 머물렀던 여인숙의 담에 담쟁이와 등나무가 있다.

길지않은 인생에서, 고흐만큼 얽히고 설킨 등나무 같은 갈등속에서 산 사람이 또 있을까?

척박한 담위에서도 예술의 혼은, 담쟁이처럼 벋어나가다, 마지막 잎새처럼 외롭게 간걸 말해주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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